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베 사다 사건 (문단 편집) == 체포 == 이시다의 사망 정황과 남자를 죽인 범인이 [[게이샤]] 출신 여인이라는 정보는 즉시 국민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물론 전국을 발칵 뒤집은 스캔들 때문이기도 하지만 연인을 살해하는 위험한 사악한 여인이라는 일본의 민속적 전통 때문이기도 하다. 아베 사다는 당대의 일본들에게 그 공포를 극적으로 표현한 실존 인물이었다. 아베 사다에 대한 수색에 대한 광분은 '아베 사다 패닉(阿部定パニック)'이라고 불리면서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 지금 기준으로도 상당히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이 사건의 전말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엽기적인 살인을 저지른 범인이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들은 아베 사다를 당시 일어난 [[2.26 사건]]으로 어두워진 사회 분위기를 밝혀주는 [[여신]] 같은 존재로 떠받들기까지 했다고 하며 당시 최고의 유명인이 되어 사건이 일어난 '만사키'와 '시나가와관'은 매일같이 최고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출처: 체페슈의 공포가든] 경찰은 여러 도시에서 아베 사다를 목격했다는 신고를 접수했으며 한 번의 허위 목격으로 긴자 강에서 하마터면 우르르 몰려들어 교통 체증이 크게 발생할 뻔했다. 당시 일본에서 터졌던 도쿄 쿠데타([[2·26 사건]]) 또는 "니니로쿠 사건"(2.26), "2·26"(2월 26일)을 언급하면서, 이 범죄는 풍자적으로 "고이치하치 사건"(5.18) 또는 "5·18"로 불렸다. 도주한 아베 사다의 이후 움직임은 시시각각 수사본부로 들어갔다. 5월 19일자 요미우리 석간은 그녀의 추적 과정을 정리했다. >18일 아침, 오쿠삼업 자동차의 하이어로 대합 '마사키'를 나와, 신쥬쿠 이세탄마에 교차로에 이르러, 거기서 차를 타서, 그리고 엔타쿠[* 택시를 말한다.]로 갈아 타서 오전 9시 반경, 겸사겸사 아는 시모타니구 우에노마치 3노10, 구제점 '타나카 제3분점' 오노 신지카타에게 나타나 '따뜻해졌기 때문에, 이제 이것은 입고 있을 수 없어요. 뭔가 멋진 세루[* 흔히 말하는 모직 기모노]는 없습니까'라고, 흐트러진 모습 없이 가게 안을 잠시 둘러보고 있었지만, 바라는 물건이 없었기 때문에, 은색과 흰색의 비늘 무늬가 있는 옅은 쥐색 우즈라오(메추리밥) 홑옷을 5엔에 구입하고, 입고 온 사각형 부직포 축조 기모노, 엷은 쥐색 우뭇가사리(옷) 50겹으로 갈아입을 옷을 산다. >소중하게 소지해 온 신문 꾸러미와 벗어 던진 장수반을 그 보자기에 싸고, 이것을 안고 10시 넘어서 떠났다. 사다는 그 길로 칸다구 아와지쵸의 반다이 여관에 츄쿄상업학교장 오미야 고로 씨를 방문해 오전 10시경, 오미야 교장과 함께 외출했다. 오미야 교장의 신청에 의하면, 두 사람은 스다쵸 교차점의 만소와실점의 앞까지 걸으면서, 사다는 '여러 가지로 신세를 졌습니다'라고, 이별의 말인 것 같은 것을 말하면서, 니혼바시의 모 소바야에 들러, 여기서 30분 정도 이야기하고 헤어져, 그것보다 교장은 전국 상업학교 교장회의에 나갔다고 하지만, 오전 11시쯤 토시마구 니시 스가 모 2쵸메 미도리 가게 여관에 들러 약 1시간 밀담 한 후, 정오 너무 어디론가 가버린 것으로 나타났다.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a0e0dc65402325a0ad0f5964c47045be445948.jpg|width=100%]]}}} || ||<-3> '''{{{#fff 아베의 움직임을 도해로 한 신문}}}''' || 당시 아베 사다의 행동은 변장이라기보다는 [[기모노]]를 입는 평범한 여성이 5월 후반의 계절에 맞춰 옷을 갈아입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시 언론들은 도저히 살인을 저지르고 도주 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어처구니 없는 자신감과 당당하기까지 해 우아함마저 느꼈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20일자 아침 신문은 아베 사다가 18일 오후 신바시의 헌옷 가게에서 다시 셀의 기모노로 갈아입은 것을 각지의 알렸다. 도쿄아사히신문은 제목을 '대담, 다시 변장해 바람처럼 사라진다'고 적었고 시사 신문은 '마치 변환의 여배우'라고 적었다. 당시 언론들은 아베 사다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하게 전했다. 아사히신문, 도쿄니치니치신문, 요미우리신문, 국민신문 등 대형 신문들이 너나할거 없이 그녀의 발자취를 분석해 신문에 넣는 소동까지 일었다. 당시 아사히 신문은 그녀의 수사를 이렇게 적었다. >경시청 수사당국이 전 관하의 경찰은 물론, 가까운 현 각지의 대략 범인이 돌아다니야 할 염려가 있는 온천지를 비롯해, 모든 계통에 물샐틈없는 수배를 하여 엄탐(엄중탐색)을 계속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검거에 이르지 않고, 게다가, 그 후 판명될 아베 사다의 도주 경로는 교묘하게 그물망을 피해, 맹렬한 경찰당국을 기세로 삼아, 향후 더욱 더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있어, 어떤 모습만을 보이고 있으며, 앞으로 과연 어떤 방면으로 그 모습을 드러낼지 관심은 점점 더해갈 뿐이지만…… 그녀가 도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녀를 본 사람은 오미야 고로였는데 그녀는 오미야에게 사과했다. 오미야는 "왜 사과하냐?"는 반응을 보였지만 나중에 그녀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파괴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936년 5월 19일, 아베는 쇼핑을 하러 가서 영화를 보았으며 가명으로 시나가와의 한 여관에 머물며 마사지를 받고 맥주 3병을 마셨으며 친구 오미야와 이시다에게 작별 편지를 쓰면서 하루를 보냈는데 살해 1주일 후 [[자살]]을 계획했다고 한다. 이후 전국에서 오인 목격이 수없이 발생했으며 도쿄의 한 쇼핑가에서는 오인 목격이 발생해 많은 인파가 몰렸지만 사다 자신은 여전히 호텔에 가명으로 머물면서 유서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체포 이후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이시다의 음경에 애착을 느껴 조용히 손을 떼야 죽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있는 종이를 뜯어 그의 음경과 음낭을 응시했다. 그의 음경을 입에 넣고 심지어 내 안에 넣으려고도 했다. 하지만 계속 시도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오사카로 도망치기로 결심하고 이시다의 음경과 계속 함께 지내기로 했다. 결국, 나는 그의 음경을 잡고 이코마산의 절벽에서 뛰어내릴려고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da_Abe.jpg|width=100%]]}}}|| || {{{#ffffff ''' 체포된 직후의 사진 [br] 살인 사건인데도 화기애애한 모습을 볼 수 있다. ''' }}} || 하지만 사건으로부터 이틀 뒤인 5월 20일 저녁 도쿄니치니치신문과 호치신문은 [[호외]]로 그녀가 잡혔다는 신문을 퍼트렸다. 당시 이 사건이 얼마나 주목받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도쿄니치신문은 '괴기 살인 사건의 요부 아베 사다 체포'라는 제목의 호외를 냈다. 그 내용은 이러했다. >수사 당국은 20일 오후 5시 반경, 범인 사다가 시바구 타카와쵸 76, 시나가와 여관에 잠복중인 타카와서 안도 부장 형사가 검색 후 발견한다. 소지품인 이시다 키치조군의 팬츠, 메리야스 셔츠, 깡통 따개 칼 및 절단한 국소(음경)에 의해 확실히 범인으로 판명. 본서에 동행, 수사 본부에 급보했다. 아베 사다가 등록한 가명을 의심한 경찰 형사들이 그녀의 방으로 찾아왔다. 아베 사다는 경찰에게 "너무 격식 차리지 마세요. 아베 사다를 찾고 계시죠? 그게 나에요. 저는 아베 사다입니다."라고 말하고 경찰이 납득하지 못하자 그녀는 증거로 이시다의 성기를 내보였는데 경찰에게 체포되어 8회에 걸쳐 심문을 받았다. 심문관이 아베 사다에게 이시다의 성기를 자른 이유를 묻자 사다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머리와 몸을 함께 가져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가장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의 역할을 하고 싶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너무도 태연하게 말한 뒤 그대로 순순히 붙잡혀서 경찰들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5월 21일자 아침 신문에 각지에 의하면 아베 사다는 '[[오사카]]의 이코마산에서 투신 자살하려고 시나가와까지 왔다'고 자백했고 유서를 3통 준비하였다고 했는데 그 중 1통은 살해한 키치조에게 적은 편지였다. 편지의 내용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당신. 죽어서 제 것이 되었습니다. 곧 저도 가겠습니다. 당신의 나 올림.'이었다. 범행의 상황, 동기에 대해서도 곧 진술하기 시작했는데 '짝을 이룰 수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잠자는 얼굴을 사랑했기 때문에, 잘 때 살해했다.'고 진술했다. >이시다와의 장래를 생각하면, 이시다에게는 훌륭한 아내가 있어, 아무리 사랑해도, 이대로는 한 달 중 보름 정도 밖에 만날 수 없습니다. 목숨을 걸고 따르는데 견딜 수 없는 고통입니다. 차라리 죽이고 자기도 죽는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여 살해를 결심한것입니다. 이시다를 가장 사랑했던 것은 저인데, 장례식에 입회할 수 없는 것은 정말 유감입니다.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몸 일부를 잘라냈습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img_6282d2d0308a8caf17bfd0c7cbc931bc1229427.jpg|width=100%]]}}}|| || {{{#ffffff ''' 당시 아베 사다 사건을 보도한 아사히 신문[* 당시 이름은 도쿄 아사히 신문.] ''' }}} || 심문관은 '왜 이시다를 죽였느냐'는 질문에 대답에 충격을 받기도 했으며 "그녀는 흥분했고 그녀의 눈은 이상한 방식으로 반짝였다"고 말했다. 아베는 심문관에게 "저는 그를 너무 사랑했고, 그를 혼자만 알고 싶었어요. 하지만 우리가 [[부부]]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가 살아있는 한 그는 다른 여자들을 안을 수 있었어요. 내가 그를 죽이면 다시는 다른 여자가 그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를 죽였어요."라고 대답했다. 이 사건은 당시 유행하던 에로틱 [[그로테스크]] 양식과도 공감을 불러일으켰으며 이후 수 년 동안 이 장르를 대표하는 사건이 되었다. 범행 내용이 공개되자 "이시다의 [[대물(신체)|음경이 비범하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지만]] 체포 후 아베를 심문한 경찰관은 "이시다의 음경은 평균에 불과하다"며 부인했다. 심문관은 "아베가 나에게 말했다. '크기는 사람을 침대에 눕게 하지 않는다. 기술과 나를 기쁘게 하려는 욕망이 이시다의 마음에 들었다.'"고 전했다. 체포 후 이시다의 음경과 고환은 [[도쿄대학]] 의학부 병리학 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직후 공개 전시됐으나 이후 사라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